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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부-오대산(五臺山)에 잠든 '천축의 꿈']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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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도반이며 또한 같은 스승을 모셨던 사형사제 지간이며 그러면서도 훌륭한 스승이던 불공삼장(不空三藏)이 병마로 쓰러져 입적하게 되자 문득 무상(無常)을 느낀 혜초는 문득 허망해졌다. 3대에
걸친 역대 황제들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으며 제사(帝師)라는, 승려로써는 최고의 신분과 높은 관직에 오르는 온갖 영광을 누렸음에도 불고하고, 결국 ‘생사의 길’은 이러하다는 것을 후인들에게 몸소
보이시려는 듯 그렇게 불공삼장이 떠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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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산 전경 |
문득 혜초는 자신의 육신을 돌이켜보았다. 이미 그도 5만 리를 걸어서 천축을 순례했던 철인 같았던 젊은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자기도 긴 나그네 길의 회향을 할 때가 되었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하여
반백년 동안의 장안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는 마침내 780년, 오대산으로 향했다.
장안에서 오대산은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이미 고희(古稀)를 훨씬 넘긴 노구인 그에게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 길은 동쪽으로 뻗어 있었다. 해가 뜨는 동쪽 하늘 아래에는 닭울음소리 들리는 그의
고향 계림(鷄林)이 있겠지만 그곳은 노구의 혜초에게는 너무 멀고 아득하였다. 미물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중생들의 본성이라지만 했지만, 아니 이미 세계정신을
초월한 밀교의 고승 혜초사문에게는 육신이 태어난 고향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해동의 고향으로 간들 그 누가 있어 반겨줄 것인가?
오대산으로 향하는 멀고 힘든 길 위에서 혜초는 문득 장안에서 보낸, 반세기나 되는 긴, 세월 중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바로 그 때가 내도량에서 지송승(持誦僧)이란 직책을
맡아볼 때였는데, 스승 불공삼장을 모시고 황제가 사는 대명궁(大明宮)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만백성의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기도 했었다. 아니 그 때 보다도 더 찬란했던 때가 있었다면, 자신이
대종(代宗)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선유사(仙遊寺) 거북바위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였다. 해동출신이란 외국인의 신분으로 대당황제와 중원의 중생들을 위해 철야기도를 하기 시작하여 7일 후에
마침내 명주실 같은 감로수가 매 마른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오대산(五臺山, 3058m)-중국어 발음의 ‘우타이샨’은- 대륙의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적에는 도교(道敎)에 의하여 개산(開山)되었으나 5세기 후반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에 의하여 불광사(佛光寺)와 청량사(淸凉寺) 등이 세워짐으로써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거처하는 청량산과 동일하게 인식되어 불교의 성산이 되었다. 수, 당 때에는 법화(法華)·
화엄(華嚴)·천태(天台)·정토(淨土) 등의 종파와 밀교(密敎)의 고승들이 앞 다투어 사원을 개창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후 오대산의 이름은 중원뿐만 아니라 한국·일본·중앙아시아·티베트·인도에까지
전해져서 지금도 중국의 ‘4대 성산’의 하나로 꼽혀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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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황석굴에 그려진 당대 오대산 전경도 |
당나라 중기에 오대산은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대종(代宗) 때에는 인도의 유명한 밀교승인 불공삼장(不空三藏)이 황실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767년 금각사(金閣寺)와 옥화사(玉華寺)를 건립하여
문수신앙의 본산으로 자리 잡게 했다. 오대산의 번영은 845년 무종(武宗) 때의 법난인 회창폐불(會昌廢佛)로 된 서리를 맞았으나 그 후에 다시 역대 왕조의 지원을 받고 기사회생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몽골이 중원에 자리 잡고 원(元)나라를 열고 티베트불교를 국교로 받아드리면서 다시 한 번 크게 번창하게 되었고 그 바통을 청(淸)나라가 이어받았다. 특히 청 태조 누르하치는
‘만주사리황제(曼殊師利皇帝)’라고 불려지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막 점령한 중원대륙 중생들에게 선포하는 의미를 갖는 호칭이었다. 문수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는
화엄이나 밀교 양쪽에서 모두 비중이 무거운 보살이다. 화엄(華嚴)사상에 의하면 청량산(淸凉山)은 문수보살의 거처인데, 이 산이 바로 오대산과 동일시 한데서부터 문수도량화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원과 청나라에 의한, 오대산의 문수성지화는 물론 종교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이민족의 나라를 통치하고자 함이었다. 이 통치술은 역대 황제에게 대대로 답습되어 오대산은 청 왕조의 보호아래 이른바
라마교 또는 황교(黃敎)라고 부르는 티베트불교의 색채가 농후해졌다.
이 상황은 지금까지 별 변함이 없는데, 종교를 부정하는 유물논자들인 중국공산당의 치하에 있는 현실에서도, 현재 오대산에 있는 47여개의 사원 중에서 그 중 절반 가까이가 황교-티베트불교의 영향권
아래의 사원들이다. 그 중 56m높이의 웅장한 하얀 라마탑이 솟아있는 탑원사(塔院寺)가 오대산의 무게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오대산 순례는 타이화이쪈(台懷鎭)이라는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먼저 샨시성(山西省)의 중심지 타이웬(太原)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가야한다. 이곳이 오대산의 베이스캠프에 해당되기에
교통편과 숙소잡기가 편리할뿐더러 대표적 유명 사찰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어느 곳에서나 어둠이 몰려들기 전에 하루 밤 지낼 숙소를 정해야하는 것이 ‘수칙 제1조’ 임은 들먹일 필요가 없지만, 중국 같이 아직도 사회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더욱이 한
겨울에는 더더욱 잠자리의 해결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버스기사가 추천하는 초대소에 대충 냉기를 면할만한 방을 하나 정해놓고는 한 끼 식사를 때우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어둠이
짙어져오고 있었는데, 때마침 온통 천지사방에서 들리는 요란한 저녁예불 소리가 불국토 같이 장중한 하머니를 이루며 울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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