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공상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존재를 머리 속에 그려보자. 그 외계존재를 그리는 영화 제작자는 최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엄청나게 괴기한 모습을 연출해 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도 역시 인간의 상상력이라 외계존재의 괴기성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인간 언어로 괴기의 존재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기하더라도 인간이 갖고 있는 언어의 상상력으로 국한되어 재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 눈이 배꼽에 붙었고 다리가 새 개이며, 팔이 여덟 개를 갖고 있는 괴기이더라도 역시 인간의 눈과 다리, 팔이라는 언어적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을 초월한 존재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언어의 상상력을 초월한 존재가 없다면 인간 언어에 제한되지 않은 어떤 초험적 존재의 실재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뜻인가? 이 이야기는 상상력과 언어 그리고 감각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자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언어에 제한된 존재와 실재의 세계가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공과 색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공과 색의 관계를 우리가 안고 있는 언어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마치 서로간의 모순된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모순관계란 서로가 공존할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내 저고리의 색깔이 검으면서 동시에 흰색일 수는 없다. 이런 예를 모순이라고 한다. 그러나 검은 저고리와 흰 바지는 당연히 모순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공과 색의 관계에서 모순적 관계에 대해 오해를 갖는 것이 있다. 그 오해가 낳은 한 사례를 말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보자. 아인슈타인이 말한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인 그 유명한 E=mc2 이라는 아인슈타인 관계식을 공과 색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한다. 물질과 에너지가 등가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유형적인 물질의 질량을 색으로 놓고 무형적인 에너지를 공으로 놓을 때 공과 색이 서로 전환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전제를 해야 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물리적 차원에서 전환 가능한 물리량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공과 색은 물리적으로 전환 가능한 동일한 사유의 지평선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공과 색은 하나이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양성적인 두 존재가능성일 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전환되는 전환 가능한 무엇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성격을 두고 논리적으로는 ‘존재범주’가 다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색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공이라고 한다지만 색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도 공의 호흡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공이 무엇이지 잘 모르지만 공의 세계 안에 들어와 있다해도 색의 화려함을 공유할 수도 있다.
색과는 존재범주가 다른 공을 색으로 말하려는 것에 대한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공에 대한 접근 방식을 불립문자라는 우주적 울림판을 통해서 듣고자 했다. 우주적 울림판을 통한 소리는 지난 호에 말한 디지털 에너지로는 도저히 묶어낼 수 없는 정보 없는 정보의 소리였다. 공의 모습은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상징이나 기호로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반언어나 반기호 혹은 반상징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공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공을 마냥 반언어와 반기호 그리고 반상징을 추구하는 선(禪)의 구도로만 접근할 수 있는가? 공을 언어, 상징, 기호의 반대개념으로만 간주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공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상상력 또한 넘어서 있다. 그래서 공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기도대상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공의 세계를 영성 체험이나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영성 체험과 현실 경험은 모순적인 두 현상이지만 공의 세계에서는 그 두 경험이 공존한다. 공의 존재범주란 영성 체험이 현실 경험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의 존재범주에서는 아예 기독교의 개념인 영성이라는 말조차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은 심우도에서 보는 십우도에 해당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공을 비어 있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정통적이라고는 하지만, 꽉차 있음으로 접근하는 방식도 현대 과학시대에는 필요하다고 본다. 비어 있음과 꽉차 있음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모순관계가 아닌 듯하다. 공은 비어 있음과 꽉차 있음의 두 날개가 있어야 비로소 날 수 있는 새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