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없다면 하늘의 깊은 맛도 느끼지 못한다. 가을 하늘에 먼 구름이 나름대로의 모양을 꾸미고 있으니 하늘의 장엄함이 비로소 꽃피게 된다. 구름 한 무리가 낮은 땅에서 높은 하늘에까지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한참 후에 보니 용의 형상은 간데 없고 흩어진 조각 구름만이 있었다. 용의 하늘 무늬를 아쉬워한들 모두가 지나간 것이며, 잡히지 않는 흐름이었다.
무상함의 깨달음은 부정의 상상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꽉 차 있음에 대한 새로움의 깨달음이다. 구름무늬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지만, 원래 없었던 구름무늬를 없다고 느끼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구름무늬가 없다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마음을 새로이 고쳐먹고 원래 있는 것을 있다고 느끼는 일은 쉽지가 않다. 무상의 깨달음은 있음과 없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있게 되는 것과 없게 되어 가는 흐름에 대한 깨달음이다. 결국 무상을 아는 일은 새로움을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을 내 몸의 언어로 발산시킬 수 있는 행위의 실천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늘에서 용의 무늬가 없어짐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상이 무한히 그려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바로 무상을 아는 일이다. 용의 구름무늬가 없어 졌다고 해도, 하늘은 다시 용궁이나 백두산, 혹은 새털이나 로봇 태권 브이의 구름무늬가 다시 그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새로이 갖게된 것이다. 무상은 있음의 지워짐이 아니라 있음의 다양성을 슬쩍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무상은 허무와 적멸의 실존논리가 아니라 새로움의 존재논리이다.
선재라는 사람이 있다. 선재는 이 그림을 터널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선재는 작은 깨달음이 있어서 이 그림을 지붕으로 보게 되었다. 선재가 터널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인지작용에 대하여 후회와 어리석음을 내뱉으면서 현상계의 무상함을 말했다. 어제 마시던 해골의 물이 오늘도 여전히 같은 물이거늘 물의 의미를 부여하는 선재의 어리석었던 어제가 오늘을 다른 세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상을 이해하는 마음은, 터널이 지붕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무상을 보는 마음은 같은 대상이라도 터널로도 볼 수 있고 지붕으로도 볼 수 있다는 새로움과 다양성을 산출하는 마음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있는 없음’이며 ‘없는 있음’이다. 어렵게 말해서 이를 일러 공의 논리라고 한다. 보통 말하기를 공이란 꽉 차 있지만 그 안에서 어는 것도 고정된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빈 하늘만을 보고 하늘을 쉽게 눈치챌 수 없듯이, 공 역시 비어 있는 공만을 말하면 너무 어렵고 형이상학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공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아는 일은 단순한 형이상학의 깨달음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도움이 되면 더 좋다. 공(空)은 대장간에서 무엇인가가 만들고 있는 일이다. 못쓰는 칼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기도 하고, 쟁기를 다시 녹여서 문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칼은 있는 것이지만 칼이 용광로에 들어가면 칼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녹은 쇳물은 여전히 있다. 대상을 말할 때 칼의 입장에서 말할 때와 쇳물의 입장에서 말할 때 공의 뜻은 많은 차이가 난다. 우리는 현대라는 시간의 배를 타고 있다. 그 배는 과학, 이성, 기술, 소외, 자본이라는 몇몇 돛대를 달고 그냥 앞으로 항해하고 있다. 그 중에서 과학이라는 돛대가 가장 큰 휘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칼의 입장에서 과학과 공의 세계를 비유하는 일은 피상적이고 현상을 변명하는 일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쇳물의 입장에서 볼 때 과학과 공의 세계는 서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열어 놓고 있다. 그럴 때 불교는 고증학이나 박물관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임상학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과학과 불교라는 지면공간을 앞으로 펼쳤으면 한다. 필자의 능력에서 그것이 가능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