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려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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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여 어떠한 고통[楚靑]도 주지 않으면 현세에서도 해침을 받지 않고 후세에도 영원히 안온하리라. 법구경 도장품(刀杖品)   
불전전산화의 역사와 전망
꿈과 열정
한국 불교인의 입장에서 불전전산화의 역사를 되돌아 보자면 , 무엇보다 먼저 두 사람의 주요한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종림 스님과 버클리 대학의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가 그들이다 .

랭카스터 교수는 1995년 , 62세가 되던 해에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

“이 일은 적어도 내게는 일생의 사업입니다 . 저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을 이 일에 바칠 수 밖에 없습니다 . 이 일은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입니다 . 자료를 컴퓨터 속으로 집어 넣고 , 그 자료들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지요 . ”
역사라고 해 봐야 십 년 남짓의 세월일 뿐이다 . 전산화를 추진해 왔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짧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 불교사를 통틀어 보자면 하챦은 기간에 불과하다 . 랭카스터 교수의 짧은 언급 속에는 그 시간 동안 전산화를 추진해 왔던 사람들의 비젼과 열정들이 모두 담겨 있다 . 그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태어났고 , 그래서 이 일들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들은 ‘이 일 ’을 일생의 사업으로 받아 들였고 , ‘이 일 ’의 실현을 위해 열정과 정성을 바쳤다 .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종림스님도 마찬가지였다 . 그에게도 비슷한 꿈이 있었고 , 비슷한 열정이 있었다 . 고려대장경 전산화의 역사는 1985년 무렵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 종림스님은 해인사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 고려대장경 목록과 해제의 전산화를 시도했다 . 당시 강주로 있던 무관스님과 강원 학인들 , 그리고 가까이 지내던 몇 사람의 컴퓨터 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동참을 했다 . 물론 한자는 처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 경전의 이름과 번호 , 그리고 30자 내외의 간단한 해제를 달아 경전 별로 입력 카드를 작성했다 . 그러나 ,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 입력할 자료는 만들었지만 , 정작 컴퓨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산중에 살던 가난한 스님들에게 당시 가격으로 천만원을 넘나들던 컴퓨터는 그림 속의 떡일 뿐이었다 . 학인들이 여가시간을 내어 작성했던 카드들은 라면 박스에 담긴 채 , 창고 속으로 들어갔고 ,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 버렸다 .

고려대장경 전산화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 이와 비슷한 시도와 실패들이 거듭되었다 . 꿈과 비젼만 있었지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 이러한 현실은 랭카스터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초기에 불전 전산화를 꿈 꾸었던 모든 사람들의 처지들도 비슷했다 . 그들은 꿈과 비젼을 가지고 있었지만 , 이를 실현시킬 방법도 몰랐고 , 능력도 없었다 .

비슷한 꿈을 꾸었던 사람들

전산화의 가능성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 종림스님과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의 만남이었다 . 이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 불전 전산화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는 만남이었다 . 당시 랭카스터 교수는 중국 상해의 한 연구소를 통해 고려대장경의 입력을 시작하고 있었다 . 그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약간의 연구비를 들여서 대반야경의 일부를 시험적으로 입력한 상태였다 . 일단 입력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는 하였지만 ,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예산도 없었고 , 인력도 없었다 . 그는 다만 긴 장정의 첫발을 내어 딛고 있을 뿐이었고 ,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

1993년 봄 , 버클리 대학에 재직 중이던 랭카스터 교수는 불전전산화의 홍보를 위한 조그마한 워크숍을 열었다 . 불교학을 전공하던 학생들과 관심이 있던 교수 몇 사람을 위한 간단한 모임이었다 . 이 자그마한 모임이 역사적인 만남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 이러한 만남은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 종림스님이 해인사 안에 이름뿐인 연구소를 설립하고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무렵이었다 . 연구소측에서 랭카스터 교수의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도 우연일 뿐이었다 . 랭카스터 교수는 당시 ,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는 이야기를 했고 ,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 있으며 ,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협력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

이 만남을 통해 두 가지 합의가 이루어졌다 . 하나는 해인사 대장경연구소가 고려대장경 전산화의 주체 (나아가서는 한역대장경 전산화의 주체 )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 이러한 합의에 따라 , 랭카스터 교수는 기간의 입력자료를 포함하여 모든 관련자료들을 해인사 대장경연구소에 조건 없이 기증을 하였다 . 그 자료들 안에는 초기 실험 입력을 위해 상해의 화학연구소와 주고 받았던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팩스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 다른 하나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조직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 일은 빠르게 진전하기 시작했다 . 소위 EBTI(Electronic Buddhist Text Initiative)라고 부르는 조직의 결성이었다 . 랭카스터 교수의 넓은 인맥과 추진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 이야기가 나온지 단 몇 일 만에 십여 명의 학자들과 스님들이 버클리 캠퍼스에 모일 수 있었다 .

이 모임에서 태국 마히돌 대학에서 개발한 팔리 텍스트 검색시스템에 대한 시연이 있었다 . 태국의 팔리텍스트 전산화 프로젝트는 왕실의 지원으로 1986년에 시작하여 1988년에 첫 결과물을 내 보일 수 있었다 . 당시 모임에는 젊은 스님 한 분과 컴퓨터 학자 한 분이 함께 BUDSIR(Buddhist Scriptures Information Retrival)라고 하는 검색시스템에 대한 시연을 했다 . 스님들이 참여했던 입력과정이나 불교학자들과 컴퓨터 학자들의 협력과정 등에 대한 설명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

하지만 , 당시 참석자들의 관심사는 한적 불전의 전산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 팔리 텍스트의 전산화는 로마자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입력과 검색에 특별한 장애랄 것도 없었고 , 텍스트의 양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 하지만 , 한적 불전의 경우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 한문의 입력 자체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당시 모임에 참석했던 학자들은 모두 , ‘불전 전산화의 성패는 한적불전에 달려 있다 ’ 는 결론에 동의했다 .

스위스 출신의 불교학자 , 우르스 압 (Urs App) 교수는 이 모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학자였다 . 그는 당시 일본 교또의 하나조노 대학 산하의 국제선학연구소(International Research Institute for Zen Buddhism (IRIZ)에 머물고 있었는데 , 연구소의 지원으로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 그가 선택했던 방법은 스캐너를 이용한 자동인식시스템이었다 . 그는 기존의 자동인식시스템을 대정신수대장경의 환경에 맞게 개선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이미 우르스 압 교수의 시스템을 도입하여 일부 실험 입력에 착수하고 있었다 . 그의 자동입력방식은 그런대로 작동은 했지만 , 아직 원시적인 단계에 있었고 , 실용화시키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 우선 신수대장경의 한 페이지를 스캔하고 인식하는데 , 거의 한 시간 이상이 걸렸으며 , 인식의 성공율도 최대 90%를 넘지 못했다 . 당시 이 시스템은 NEC의 하드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 가격들도 비쌌고 , 무엇보다 호환이 전혀 되지 않았다 . 하여간 그는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상당량의 선적들을 입력하였고 , 이 자료들을 활용하여 선적들의 일자색인을 만들어 출판하고 있었다 .
전통적으로 불전 연구에 있어 색인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 우르스 압 교수의 전산화 방식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 당시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는 , 그의 방식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과도 같은 평가를 받았다 .

하지만 , 그의 시스템은 입력의 효율성면으로만 따지자면 , 대만에서 개발한 시스템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 소위 대만의 BIG-5 코드 시스템을 사용하면 대략 13,050자 정도의 한자를 입력할 수 있었다 . 랭카스터 교수가 중국 상해의 화학연구소에 의뢰하여 입력한 자료들도 이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 입력 비용도 적게 들었고 , 무엇보다 호환이나 활용이 쉬웠다 . 하지만 , 당시만해도 중국과의 교류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 입력비용 이외의 부수적인 비용들이 들어야 했으며 , 의사소통이나 자료들이 오고 가는 기간도 매우 더뎠다 . 당시 , 대만의 중앙연구소에서는 7만여자의 한자를 처리할 수 있는 CCCII 코드를 개발하여 학술적인 자료들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 이와 같은 시스템은 고가의 메인프레임을 필요로 했고 , 표준이나 호환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 이와 같은 입력방식을 둘러싼 논란들은 전산화의 과정 내내 끊이지 않고 사람들을 괴롭혔던 문제였다 .

희유한 만남 : EBTI
어쨌든 이 조그만 워크숍의 결과 , 불전전산협의회 (EBTI)가 탄생했다 . 표현은 그럴 듯 했지만 , EBTI는 아무런 힘도 없는 유령단체에 불과했다 . 이는 다만 종림스님과 랭카스터라는 ‘사람들의 만남 ’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다 . 그들은 전산화를 추진할 수 있는 돈도 조직도 없었으며 , 구체적인 전략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다만 꿈과 열정 뿐이었다 . EBTI의 결성은 태평양이 내려다 보이는 랭카스터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 회의를 치룰 변변한 예산도 없었고 , 학교의 지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십여 명의 학자들이 참석을 했지만 , 그들 모두가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 팔리나 산스크리트 , 티베트 불전을 다루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 그들의 꿈은 또 달랐다 . 그들 안에서도 종림스님이나 랭카스터의 꿈과 열정을 믿는 사람들은 실제 몇 사람 되지 않았다 . 그들의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더 적었다 .

고려대장경과 EBTI. 이 희유한 만남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랭카스터라는 사람 ,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랭카스터 교수는 고려대장경 목록을 영문으로 출판했던 사람이다 . 학술적으로 보자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 당시 박 성배 교수가 그를 도와 주요한 작업을 추진했다 . 그가 고려대장경을 만나는 장면 자체가 극적이었다 . 그의 회고에 따르면 , 그가 버클리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으로부터 고려대장경 인본 한 질이 도착했다고 한다 . 수백 개의 나무 박스 안에 들어 있던 경전들은 충격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고 , 목록 작업을 추진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갔다고 한다 . 그는 고려대장경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 그는 1996년 고려대장경 입력의 완료를 기념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여 매우 감상적인 연설을 했다 . 그의 연설은 고려대장경의 조조를 추진했던 수기스님의 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수기스님의 꿈이 종림 스님의 꿈으로 이어졌고 , 자신의 꿈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 그는 CD-ROM에 담긴 고려대장경이 마치 수기 스님 자신인 것 같다는 회고를 하기도 했다 .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EBTI라는 조직의 배경이다 . EBTI는 PNC(Pacific Neighborhood Consortium; 태평양근린협회)라는 기구의 하부 조직으로 출범을 했다 . 이 기구는 대학총장들의 모임이 주체가 되어 결성한 기구로서 , 인터넷 환경의 발달에 따라 , 태평양 연안의 나라들이 학술적인 자원들을 공유할 수 있는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발족을 했다 .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기구가 흔히 그렇듯이 실무를 추진할 수 있는 조직력이나 구속력을 갖추지 못한 채 , 국제학술회의나 홍보 이벤트 등의 , 명분 상의 활동에 주력하던 기구였다 . 당시 버클리의 커티스 하딕 (Curtis Hardyck) 교수가 기구의 Executive Director로서 주요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 랭카스터 교수는 그의 가까운 동료로써 주요사업의 결정과 추진에 조언을 하고 있었다 . 랭카스터 교수가 EBTI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 명목상으로나마 꾸준히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이 PNC라는 기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첫째 , PNC라는 기구의 이념 자체가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학술자원의 공유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 불전전산화의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 랭카스터 교수는 초창기부터 PNC의 이념의 정립이나 사업추진 과정에 관여를 해왔으며 , 이를 통해 불전전산화 사업의 모델을 찾고 있었다 .
셋째 , PNC는 미국 , 일본 , 대만 , 중국 등 태평양 연안국가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 EBTI는 PNC의 하부 프로젝트로서 정기적으로 이 학술회의에 참여를 할 수 있었다 .
넷째 , PNC를 통해 광범위한 인맥과의 교류가 가능했고 , 이들을 통해 불전전산화를 위한 학술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산시킬 수 있었다 .

실제로 , PNC의 도움이 없었다면 EBTI라는 기구는 결성도 유지도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 당시에는 대내외적으로 EBTI는 물론 PNC 조차 유명무실한 기구일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 훗날 , EBTI가 불전전산화에 끼쳤던 영향에 비추어 볼 때 , PNC의 이러한 역할에 대하여는 평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

이루어지는 꿈

랭카스터 교수는 종림스님을 통해 고려대장경 전산화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 종림스님은 랭카스터 교수가 가지고 있던 이러한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발견했다 . 실제로 랭카스터 교수는 불전전산화를 위한 ‘선교사 ’를 자처했으며 , 그러한 선교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 랭카스터 교수가 발견했던 종림스님의 잠재력은 , 한국 승려들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잠재력이었고 , 한국의 불교계와 한국의 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던 역동적인 에너지였다 . 결과적으로 비슷한 꿈과 열정을 가졌던 두 사람의 만남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잠재력을 증폭시키고 구체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 1994년 9월에 EBTI의 두번째 모임이 해인사에서 있었다 . 그 후로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고려대장경 전문의 입력이 완성되었다 . 한국 불교계와 한국 사회가 가진 잠재력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종림스님과 랭카스터 교수 , 두 사람 외에는 누구도 믿지도 ,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 그리고 , 그 가운데에 고려대장경이 있었다 .

EBTI가 결성되던 무렵까지만 해도 고려대장경은 잊혀진 문화유산에 불과했다 . 예를 들어 , 초창기 전산화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우르스 압 교수 같은 학자들만 해도 고려대장경 전산화 계획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 그들에게는 불전의 전산화는 곧 , 일본 대정신수대장경 (大正新修大藏經 )의 전산화를 의미했다 . 대개의 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려대장경의 전산화는 말하자면 ,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 그들은 이러한 회의적인 시각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했고 , 이와 같은 사정은 국내 학자들의 경우에도 대동소이했다 . 실제로 여러 기관에서 대정신수대장경을 전산화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 중국의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 계산기실(計算機室 )은 전당시 (全唐詩 )나 전당문 (全唐文 ) 등의 검색시스템을 완성한 상태였고 ,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전국의 사회과학원 조직을 묶어 인문전뇌협회 (人文電腦協會) 라는 국제기구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
이들은 자체적으로 상당량의 대정신수대장경 자료를 입력한 상태였으나 , 예산상의 이유로 작업이 지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 대만의 중앙연구원 (中央硏究院 ; Academia Sinica) 같은 곳에서는 국가적인 지원 하에 사고전서 (四庫全書 ) 검색시스템이 거의 완성된 상태였으며 , 역시 대정신수대장경의 전산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 대정신수대장경을 출판했던 대장출판주식회사 (大藏出版株式會社 )와 같은 곳에서도 전산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들이 돌고 있었고 (실제로 동 출판사는 1996년 , 일부 자료를 CD-ROM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환경들은 모두 고려대장경전산화 계획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들은 모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연되거나 중단되고 말았지만 , 전산화의 방향은 당연히 대정신수대장경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

그러나 , 어쨌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전산화를 완성시켰던 것은 고려대장경 프로젝트였다 . 이 또한 불전 전산화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종림 스님이나 랭카스터 교수와 같은 인물들을 되돌아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들은 불전전산화의 중심을 고려대장경에 두었다 . 그들의 꿈과 열정의 중심을 고려대장경으로 삼았다 . 비슷한 비젼과 열정을 지닌 비슷한 사람들의 만남이 없었다면 고려대장경전산화 계획은 이루어지기 힘든 꿈으로 남고 말았을 것이다 .

불전전산화의 역사를 고려대장경을 중심으로 , 또는 종림스님이나 랭카스터 교수와 같은 인물들 중심으로 바라보는 견해에 대해 이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 예를 들어 , EBTI가 결성되던 당시에 태국의 ‘ BUDSIR 프로젝트 ’나 티베트 불전을 전산화하는 ‘아시아 고전입력 프로젝트 (Asian Classics Input Project; ACIP) ’는 이미 안정된 결과물들을 내어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

ACIP는 마이클 로치(Michael Roach)라는 독특한 인물이 주도하던 프로젝트였다 .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수재였고 , 일찍부터 티베트 불교를 연구해 온 사람이었지만 , 유태인들이 운영하던 다이아몬드 회사에서 딜러로써 , 경영자로써 자리를 굳힌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 그는 1987년부터 티베트 불전의 전산화를 목적으로 티베트 난민촌에 산재하는 젊은 승려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 주변 사찰을 기반으로 컴퓨터 몇 대를 사주고 , 젊은 승려들에게 약간의 인건비를 지급해가며 자료들을 입력시키기 시작했다 . 그는 이런 식으로 입력된 자료들을 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제공했다 . 이 프로젝트는 티베트 불교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 가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 비슷한 규모의 입력센터들이 십여 개 이상으로 늘어 났다 . 현재 이 프로젝트는 십여만 페이지 이상의 입력 자료들을 확보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객관적인 사실로만 따지자면 시기적으로도 빨랐고 , 일관되게 성장해 온 전산화의 모범사례로 꼽힐 만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 ACIP는 시종일관 주류 학자들의 관심권 밖에서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던 프로젝트였다 . 그 원인은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가 마이클 로치라는 개인이 운영하던 개인의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그는 그 스스로가 다이아몬드 사업이 일종의 ‘마피아 ’와 같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로 학계나 종교계에서는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 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티베트 관련 문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고 , 이미 충분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불전 전산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할 필요도 크게 느끼지 않았다 .

새로운 단계로
EBTI 2001년 회의는 동국대학교의 전자불전연구소 주최로 한국에서 열렸다 . 일본 도요가꾸엔 대학의 찰스 뮐러가 작성한 이 회의의 최종 보고서는 불전 전산화가 새로운 단계로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이제까지 EBTI의 주된 관심사는 자료를 입력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 이 회의를 깃점으로 주요 관심사가 입력에서 활용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 이러한 지적은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
첫째 , EBTI의 주요 관심사가 입력 문제에 집중해 있었다는 사실은 , EBTI의 멤버들이 불전 전산화의 중심을 한역불전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 팔리 문헌이나 티베트 문헌의 전산화는 입력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 EBTI가 지향하던 불전전산화의 이념은 다양한 언어로 씌어진 불전 전체를 통합시키는 것이었으며 , 이런 이념을 위한 가장 큰 장애물은 한역 불전이었다는 점이다 .
둘째 , 입력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은 한역불전의 장애가 사라졌다는 의미를 갖는다 . 실제로 2001에 발표된 프로젝트별 논문들은 주로 입력된 자료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 활용해야 할지를 다루고 있었다 .
셋째 , 불전전산화가 새로운 단계로 넘어 서고 있다는 선언은 바로 EBTI라는 기구의 목적 자체 또한 새로운 단계로 넘어 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

하지만 ,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1996년 고려대장경 전문의 입력이 끝나는 순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 고려대장경 연구소는 입력이 완성되는 순간부터 전산화의 목표를 통합대장경으로 수정했다 . 통합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중심으로 한역불전들은 물론 , 팔리 , 산스크리트 , 티베트 , 몽골 등의 전통적인 불전들은 물론 , 한글대장경 , 일본어 대장경 , 영역 불전 등 다양한 언어로 씌어진 불전들을 통합하여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 1999년의 EBTI 회의는 이러한 방향전환을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이 해보다 한 해 앞서 랭카스터 교수는 EBTI의 의장직을 내어 놓고 , 전자문화지도협의회( Electronic Cultural Atlas Initiative; ECAI)라는 새로운 사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 1999년 회의는 종림스님과 대만 불학연구원의 헝칭 스님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했다 .

1999년 회의는 대만의 중앙연구원 (Academia Sinica) 주최로 열렸는데 , 이 회의는 PNC를 중심으로 EBTI, ECAI, SEER(Scholars Engaged in Electronic Resources) 등의 기구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 하지만 , 대부분의 발제는 EBTI와 ECAI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EBTI가 PNC의 하부 프로젝트로서 어렵게 출범을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 EBTI와 ECAI가 랭카스터 교수의 주도로 설립되었던 기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 PNC의 이념을 명실상부하게 랭카스터 교수가 이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1997년 PNC 정기회의에서 Executive Director 였던 커티스 하딕의 오프닝 연설은 거의 랭카스터 교수에 대한 헌사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 그는 랭카스터 교수의 예언자적인 비젼에 대하여 거듭 설명을 하면서 , PNC의 비젼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때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이러한 변화는 특히 한국의 불교인의 눈으로 보자면 , 실로 의미심장한 의의를 담고 있다 . PNC는 세계 유수의 대학총장들이 발의를 해서 창립한 국제기구이다 . 따라서 ,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첨단의 비젼을 제시해 왔고 , 연례 회의 때마다 유수한 명망가들과 첨단 학자들이 참여하여 이와 같은 비젼들에 대한 토론을 해 왔다 .

다시 말해 PNC는 비젼에 의해 설립되고 비젼에 의해 유지가 되던 , 비젼을 추구하는 기구였다는 말이다 . 반면에 랭카스터 교수는 불교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작은 학술분야의 교수에 불과했다 . 그가 전공하던 한국불교는 불교학 분야에서도 특히 취약한 분야였다 . 한국불교를 전공한 불교학자의 비젼이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첨단의 비젼을 추구하던 PNC의 비젼을 이끌게 되었다는 사실은 , 랭카스터라는 일개인의 문제를 넘어 , 불교학이 , 나아가서는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비젼이나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가능해졌다는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

랭카스터 교수의 비젼이 객관화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EBTI의 성공을 통해서였다 . 버클리에서 열렸던 창립회의에 이어 , 한국의 해인사에서 2차 회의를 치루었지만 , 불교계나 한국사회는 물론 , 해인사 내부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했던 그들만의 모임에 불과했다 . 그러나 , EBTI는 불과 사 오년 , 안에 불교계는 물론 , 인문 , 사회학계의 가장 선진적인 (심지어는 유일무이한 ) 성공사례로 꼽히기 시작했다 . 이러한 성공에는 물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을 했다 . 하지만 그 어떤 원인들 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고려대장경 전산화 프로젝트 ’의 성공이었다 .

고려대장경 전산화 계획은 불전전산화에 대한 선입견들이나 방향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 고려대장경 프로젝트가 가시화되기 시작하면서 그 간에 소극적이었던 여타의 프로젝트들이 EBTI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 EBTI는 다양한 전통의 프로젝트들을 망라한 명실상부한 기구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 독립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프로젝트 들이 합류하면서 전산화의 이념 또한 확장 , 심화되기 시작했다 . 종림스님과 랭카스터 교수가 처음 만나 함께 꿈꾸었던 꿈들은 이 무렵 거의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통합대장경과 ECAI

챨스 뮐러 교수는 EBTI, 2001년 회의를 마감하면서 기구 자체의 방향을 새로운 단계로 조정할 때가 되었다는 보고를 했다 . 하지만 , 실제 이 기구는 1999년 이후 , 이미 큰 변화를 맞았고 , 그 이후는 내리막길이었다고 할 정도로 활동이나 교류가 눈에 띠게 줄기 시작했다 . 랭카스터 교수의 이탈이 일차적인 원인이 되었다 . 명분상으로는 전산화 사업들을 실질적으로 추진해 왔던 주역들에게 의장직을 넘겨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하지만 , 랭카스터 교수는 EBTI를 넘어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 ECAI라는 새로운 형태의 비젼이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전산화초기부터 불전전산화의 방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전을 망라한 ‘통합대장경’의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 이러한 비젼에 따라 1994년 무렵부터 , 고려대장경과 한글대장경을 결합시키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 연구소는 고려대장경과 한글대장경이 통합대장경을 위한 시금석이 되어야 하며 , 이를 기반으로 EBTI 프로젝트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호환하는 컨소시엄 형태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 랭카스터 교수나 EBTI의 멤버들 간에도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 이러한 계획 하에 각종 대장경 목록들에 대한 연구와 분석 , 일부 한글대장경의 입력 작업등이 추진되었다 . 하지만 , 한글대장경 프로젝트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던 시점은 , 고려대장경의 입력이 완료되고 , 일차 교정이 완료되는 1997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 결과 1998년 한글대장경 통합해제 및 분류체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고 , 같은 해 9월 , 6권 분량의 “고려대장경 해제”를 출간했다 .

1997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한 보광 스님을 소장으로 전자불전연구소를 설립했고 , “한국불교전서 ”의 전산화 계획을 발표했다 . 이에 따라 통합대장경을 위한 국내의 기반은 고려대장경연구소 , 동국대학교의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의 공동작업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는 통합대장경 계획과 병행하여 북한에서 출간한 불전들을 결합시키는 소위 ‘통일대장경 계획 ’을 추진해 왔다 .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200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문화연구소에서 출간한 17권 분량의 “팔만대장경 선역본 ”을 국내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

종림스님과 통합대장경
EBTI 내에서 통합대장경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하기 시작했던 것은 2000년 버클리 회의였다 . EBTI는 한국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통합대장경 기술소위원회 ’를 출범시켰다 . 총 9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 안에 한국측 위원은 대장경연구소와 불전연구소 등을 대표하여 4명이 참가하였다 . 물론 이런 형태의 조직을 통해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 하지만 , 이러한 조직을 통해 통합대장경을 위한 국제적인 여론과 기반은 확고해졌으며 , 향후의 통합대장경 계획은 당분간은 한국에서 추진되는 사업의 성패 여부에 달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 , 동국대학교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 그리고 북한의 민족고전문화연구소 등 , 통합대장경을 향한 기반은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 이들 기관들은 구체적인 협력사업들을 공동을 추진하고 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최근 , 통합대장경을 위한 외부로 확장시키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 기존의 협력 체계 안으로 우선 , 대만의 중화전자불전협회 (Chinese Buddhist Electronic Text Association; CBETA)와 ‘아시아 고전입력 프로젝트 (Asian Classics Input Project; ACIP) ’ , 그리고 태국의 BUDSIR(Buddhist Scriptures Information Retrival) 등의 프로젝트를 끌어 들인다는 계획이다 . 여기에 랭카스터 교수와 정신문화연구원의 이종철 교수가 추진해 왔던 산스크리트 문헌들을 추가하게 되면 통합대장경을 밑그림이 대강은 완성될 것이라는 계획이다 .
고려대장경 연구소는 1996년 입력을 완료한 이후 , 1999년에는 인터넷을 통한 서비스를 시작했으며 , 2000년에는 고려대장경 전산화본을 봉정하는 행사를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대대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 그러나 , 실제 , 전산화본의 실용성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 연구소 내부에서는 교정이나 표점 , 이체자 처리 등의 복잡한 학술적인 문제 , 코드나 검색 시스템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들에 집중한 반면 , 실용성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 실용성을 높이기 위하여 , 유니코드 본을 서둘러 발표해야 한다는 내외의 요구가 있었지만 ,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문제들에 밀려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

고려대장경 전산화본의 실용화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대만 중화불전협회 (CBETA)의 활동은 괄목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 중화불전협회는 대만 청년 불교도들의 자발적인 전산화 노력의 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초창기 청년 불교도들은 일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경전들을 입력하여 인터넷을 통해 교환하기 시작했다 . 이러한 개별적인 입력 작업들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중국의 전산화 계획들에 자극을 받아 점차 동호회 형태의 조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 그러다가 , 1997년 , 국립대만대학교 불학연구중심 (國立台灣大學佛學硏究中心 )으로 25권 분량의 대정신수대장경 입력본이 기증되면서 중화불전협회의의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당시 헝칭 스님이 불학연구중심의 소장을 맡고 있었는데 , 그는 1993년 버클리에서 있었던 EBTI의 창립모임에도 참여를 했던 초기 멤버였다 . 그는 북미인순도사기념회(北美印順導師基金會 Yin-Shun Foundation of North-America), 중화불학연구소(中華佛學硏究所) 등의 도움으로 1998 년 중화전자불전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

이들 그룹을 이념적으로 이끈 사람은 독일 출신의 불교학자 , 크리스치안 비턴(Christian Wittern) 이었다 . 그는 당시 중화불학연구소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 자연스럽게 CBETA 에 참여하여 이념적인 , 기술적인 기초를 만들었다 . 그는 일본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의 우르스 압 교수가 추진했던 IRIZ 프로젝트의 실무를 담당했던 전산화의 베테랑이었다 . 그는 선학을 전공한 불교학자로서의 전문성과 , 초창기 프로그래밍 작업을 이끌 정도의 컴퓨터 기술을 겸비한 , 불전전산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 우르스 압 교수의 전산화 시스템을 실제로 설계한 사람이었고 , 이러한 초창기 기술을 바탕으로 한문 불전은 물론 , 한적 자료의 전산화를 위한 다양한 모델들을 개발하고 그 방향을 제시해 왔다 . IRIZ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그도 독일도 되돌아갔다가 중화불전협회의 연구원으로 다시 전산화 실무를 이끌게 되었다 .

그 무렵 ,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도 그를 영입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었다 . 뒤늦게 출범한 CBETA 프로젝트가 짧은 기간 내에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전문적인 지식과 비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CBETA 의 목적은 대정신수대장경의 전산화였다 . 비턴 교수는 입력작업을 진행하면서 고려대장경연구소의 협력 하에 고려대장경 입력자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실행했다 . 이러한 실험을 통해 그는 입력자료의 실용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계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 CBETA 는 현재 대정신수대장경의 입력을 완료하고 , 완성된 자료를 인터넷과 CD-ROM 을 통해 보급하고 있다 . 고려대장경의 입력이 완료된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 전자자료를 실제로 실용화시킨 것은 CBETA 였다 . CBETA 는 한역불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책상에서 두껍고 무거운 대장경들을 몰아 내 버렸다 .

비턴 교수는 1997년부터 소위 SMART(System for Markup and Retrieval of Texts)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 이를 같은 해 일본의 교오토에서 있었던 EBTI회의에서 발표했다 . EBTI는 출범 초기부터 학술자료의 호환을 위해 , 학술자료에 대한 마크업 표준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 이에 따라 , EBTI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SGML(Standard Generalized Markup Language)과 TEI(Text Encoding Initiative)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워크숍을 운영해 왔다 . SGML은 멀티미디어나 정형 , 비정형의 복합적인 정보를 자유롭게 교환하기 위하여 , 정보 내부에 특정한 정의에 따라 태그들을 첨부시키기 위한 국제 표준의 메타 언어이다 . TEI는 SGML의 원칙을 기준으로 , 각 분야의 학술정보들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정의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의미한다 .
EBTI가 초창기부터 이러한 표준화된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던 까닭도 장기적으로 불교문헌 정보는 물론 모든 형태의 정보들이 특정한 표준 방식에 따라 통합될 것이라는 예측을 했기 때문이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의 통합대장경은 이러한 비젼의 불교적이 버젼이라고 할 수 있다 . 비턴 교수의 스마트 프로젝트는 이러한 EBTI의 비젼이 처음으로 기술적으로 가시화된 것이었다 .

CBETA의 성공은 그들이 이와 같은 비젼을 바탕으로 실용성을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전략을 채용했고 , 이러한 전략이 시의적절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이 그룹과의 지속적인 협력 하에 , 고려대장경과 대정신수대장경의 대교 작업 , 표점 작업 등을 추진해 왔다 . 따라서 , 고려대장경연구소가 통합대장경을 목적으로 CBETA와 ACIP를 일차 협력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시의적절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사실 통합대장경을 위한 기반은 이미 확립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충분한 자료들이 확보되어 있고 , 기술적인 , 이론적인 난제들도 거의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 , 전자 정보의 실요성이 늘어가면서 통합대장경이 지향하는 것과 같은 복합정보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

랭카스터 교수의 전자문화지도 프로젝트

랭카스터 교수가 이끌고 있는 전자문화지도협의회 (Electronic Cultural Atlas Initiative ; ECAI)는 199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 이듬해 버클리 대학에서 전자문화지도 워크그룹을 결성하면서 조직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 문화지도 프로젝트는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복합적인 정보들을 지도의 형태로 형상화시켜 실용성과 호환성을 높이겠다는 소박한 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 지도와 정보를 연결시키려는 아이디어는 인터넷의 월드와이드웹이 실용화되기 시작하면서 , 지도가 가진 하이퍼텍스트적인 구조의 유사성에 서 비롯되었다 . 그 후 , 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 다양한 문화정보들을 GIS 기술과 접목시키려는 시도들이 시작되었다 .

랭카스터 교수의 ECAI 프로젝트는 뮐러 교수가 지적했던 바와 같은 ‘입력으로부터 활용으로 ’ 라는 불전전산화의 ‘새로운 단계 ’로의 업그레이드를 염두에 둔 새로운 시도였다 . 랭카스터 교수의 문화지도는 이미 전자의 형태로 가공되어 있는 세계 각국의 다종다양의 정보들을 사용자들의 요구에 따라 쉽고 빠르게 제공할 수 있는 ‘도구 ’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 ECAI 또한 EBTI의 경우와 같이 독립 프로젝트나 , 학자들 간의 느슨한 조직으로부터 시작을 했지만 , EBTI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
첫째 , ECAI는 EBTI와는 달리 시작부터 자체의 예산과 조직을 가지고 시작을 했다 . 따라서 , 외부 프로젝트 들 간의 조정역할에 치중했던 EBTI와는 달리 , 독자적인 전략을 가지고 외부 프로젝트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
둘째 , EBTI의 경험을 통해 표준화의 이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을 했다 .
셋째 , 표준화의 이념이란 , 누군가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 사용자들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가는 신념에 따라 , 기존의 프로젝트들을 연결시키고 ,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지원 또는 자극시킬 수 있는 조직이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향을 가지고 시작했다 .

ECAI에는 현재 , 전세계의 지역별로 30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등록되어 있으며 , 관련 정보들은 ECAI의 홈페이지를 통해 활용이 가능하다 . 한국관련 정보의 경우에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설립 초기부터 참여를 해 왔고 , 그 후 , 동국대학교 , 고려대학교 등 10여 개의 기관에서 15종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고 있다 . 각각의 전문적인 프로젝트들이 ECAI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ECAI가 지정하는 표준 방안에 따라 각각의 정보들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 ECAI는 이를 위해 메타데이터 클리어링하우스 (Metadata Clearinghouse)라는 시스템을 통해 각각의 프로젝트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 ECAI의 목표는 각 분야의 문화관련 정보들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재해석하여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을 일원화시키겠다는 것이다 . ECAI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활용하는 일종의 전자도서관의 형태를 띠게 된다 . 각각의 정보들은 각각의 프로젝트가 소유하고 관리하지만 , 공통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쉽게 활용하고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전산화를 넘어서
불전전산화는 1996년 고려대장경의 입력이 완료되는 것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그 이전까지 전산화를 위한 관심사는 입력문제에 매어 있었다 . 고려대장경의 입력이 완료되면서 전산화의 관심사는 입력자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뀌게 된다 . 고려대장경 입력을 기점으로 그 이전 단계를 입력을 위한 모색의 단계라고 한다면 , 그 이후는 활용에 대한 모색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 랭카스터 교수의 ECAI가 처음으로 발의되었던 것은 1997년 11월이었다 .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통합대장경 계획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통합대장경 계획은 전산화 초기에 수립되어 전산화의 방향을 일관되게 이끌어 온 이념이었고 , EBTI의 취지 역시 각각의 프로젝트들을 조정하고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 1999년 , 대만에서 열렸던 , 제 5차 EBTI회의에서는 랭카스터 교수가 의장직을 사임하고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종림스님이 차기 의장에 선임되었다 . 이를 계기로 통합대장경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통합대장경이 불전 자료들의 통합을 지향한다면 , 랭카스터 교수의 ECAI는 불전자료의 한계를 넘어 , 인문 , 사회관련 정보들을 통합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

편의상 불전 전산화의 역사를 단계별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단계를 설정해 볼 수 있다 .

1단계 : 입력을 위한 모색의 단계 - 1996년 고려대장경 입력 완료 이전까지 .
2단계 : 활용을 위한 모색의 단계- 1996년 이후
3단계 : 통합을 위한 모색의 단계- 1999년 이후

컴퓨터는 불전 연구에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 불전은 양도 많을뿐더러 , 워낙 오랜 세월에 걸쳐 , 아시아 전 지역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유통을 해 왔던 까닭에 , 불전에 대한 해석은 정교한 암호를 해독하는 일보다 어려운 형편이었다 . 정확한 해석은 접어 두고라도 , 우선 불전 자체에 접할 수 있는 길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 원전을 구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 한문을 비롯하여 팔리어나 티베트어 등 , 언어를 익힐 수 있는 환경도 열악했다 . 숱한 시행착오들을 거치면서 그런 불전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컴퓨터 속으로 들어 갔고 , 컴퓨터 속으로 들어간 글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 인터넷의 발달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 불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모든 원전을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 한역대장경도 클릭 한번으로 당장에 찾아 볼 수 있다 . 불과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

불전 전산화의 종착역이라고 할 통합대장경의 꿈도 무르익어 가고 있다 . 고려대장경과 대정대장경 , 한글대장경의 통합은 이제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 팔리원전이나 산스크리트 , 티베트 원전들과의 대조도 이루어지고 있다 . 불전 뿐만이 아니다 . ECAI 프로젝트들은 불전과 기타 역사와 문화 등 , 관련된 멀티미디어 정보들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 불전을 중심으로 복합적인 정보의 네트워크가 지금 형성되어 가고 있다 .

불교인들이 발견한 꿈의 모델

불전전산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을 했고 , 인터넷의 발전은 본격적인 네트워크의 시대를 열어 주었다 . 불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네트워크 혁명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네트워크의 세계는 불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나도 익숙한 세계이다 .

불전전산화가 다른 학술 분야보다도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 어찌 보면 우연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 종림스님이나 랭카스터 교수가 꿈꾸었던 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정보의 네트워크였다 . 그들은 정작 테크놀로지 자체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 하지만 , 그들은 테크놀로지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비젼을 가질 수 있었다 . 이러한 비젼은 그들이 불교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수 있다 . 그들이 불교라는 틀 안에서 네트워크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

불전전산화가 지향하는 통합대장경의 면모는 이미 모두 드러났다 . ECAI의 프로젝트들은 정보네트워크에의 비젼을 보다 선명하게 그려준다 . 하지만 , 그렇게 만들어진 정보 네트워크가 또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지 아직은 아무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 기술이 발전하면서 , 통합대장경이나 ECAI의 비젼도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 정보들을 활용하고 유통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 하지만 , 그러한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 불전의 전산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꿈 꾸었던 방향 . 네트워크에의 비젼이다 . 네트워크라는 표현도 다만 비유일 뿐이다 . 네트워크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 . 종림 스님이나 랭카스터 교수의 꿈은 이미 통합대장경이나 , ECAI 프로젝트를 넘어 새로운 비젼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 그런 의미에서 불전전산화는 이미 셋째 단계를 넘어 네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 네트워크에의 비젼이다 .

종림 스님이나 랭카스터 교수는 십 년 남짓한 세월 안에 많은 일을 성취해 냈다 . 십 년 전만 하더라도 , 이 만한 시간 내에 이런 정도의 성취가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랭카스터 교수가 회고했듯이 , 그들은 단지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빠르게 바뀌는 이 시대에 태어났을 뿐이고 , 그래서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들이 이 일을 시작했을 때 , 그들은 결과나 성취 따위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다 . 그냥 일생의 일이라고 생각했고 , 꾸준히 일을 해 왔을 뿐이다 .

미국의 시사주간지 , 타임은 새 밀레니엄을 맞으면서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특집을 냈던 적이 있었다 . 그 특집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꼽았다 . 그의 인쇄술이 인류 전체의 잠재력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는 이유였다 . 이 특집은 정보를 가공하고 유통하는 방식이 사람들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타임지의 선택은 물론 , 우리가 그와 비슷한 변화의 시기에 놓여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컴퓨터와 인터넷 , 새로운 네트워크의 세계가 인류의 삶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 질적인 ,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 타임지가 바라 본 것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 매체의 혁명 , 정보의 혁명이었고 , 구텐베르크는 말하자면 이러한 혁명적인 변회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모델이었을 뿐이었다 . 매체가 바뀌면 인간이 바뀐다는 선언이었다 .

종림 스님이나 랭카스터 교수는 지금도 거의 컴맹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 전산화를 시작하던 무렵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 그들은 매체 , 그 자체에 대하여는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 물론 전산화와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는 기반이나 환경도 없었다 . 그런 의미에서 종림 스님과 랭카스터 교수의 성공은 , 그 자체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 들은 불전전산화의 성공을 통해 학술정보 네트워크의 선두 주자로 나설 수 있었다 .

불전 전산화의 성공은 국제 사회에서 불교학술의 지위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이들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불교학술이 비젼뿐만 아니라 , 현실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 게다가 , 이러한 성공에는 다양한 계층의 불교 커뮤니티가 동참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 불전 전산화의 성공은 불교 커뮤니티가 가진 건전한 잠재력을 드러내고 ,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불전전산화는 불교권 외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 전산화가 추진되던 초기에는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들이 전산화를 추진한다는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 학계나 언론계 , 테크놀로지 분야의 사람들이 불전 전산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 그들은 불교인들이 제시하는 비젼에 충격을 받았고 , 전산화가 현실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불교 커뮤니티가 가진 잠재력에 놀라기 시작했다 .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 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전산화를 발표한 이래 , 종림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의 작업은 끊임없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왔다 . 언론은 호기심을 가지고 스님들을 다루었고 , 사람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스님들과 컴퓨터와의 관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 불전전산화가 사회에 알려지면서 학계는 물론 , 정책 전문가들이나 컴퓨터 업계 등에서 보여주었던 관심사는 상상 이상이었다 . 결과적으로 이러한 호기심은 국내의 테크놀로지 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 고려대장경 전산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 조금이라고 관심을 가졌던 전문가 들이라면 , 한국이 IT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회적인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

랭카스터 교수는 1999년 와이어드 (Wired News)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정보를 기록하고 검색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 고 했다 . ECAI를 통해 그가 추구하던 모델이란 , 누구에게나 익숙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델이었다 . 이러한 모델은 불전의 한계를 넘어 인문 , 사회의 온갖 정보들을 망라하는 정보의 네트워크를 선도하고 있다 . 종림스님은 전산화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이후로 3차에 걸쳐 연례 학술세미나를 치루었다 . 불교의 연기의 모델을 통해 미래의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모델을 바라보자는 취지였다 . 고려대장경에서부터 시작한 불교인들의 비젼과 모델이 정보의 네트워크를 향한 구체적인 모델로 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 물론 랭카스터 교수도 종림스님도 그들의 모델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 그런 모델을 통해 억지로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 다만 그와 같은 모델을 통해 그들의 열정을 현실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그대로 미래를 향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

글: 현대불교편집위원: 오 윤희

(현대불교미디어센터 (c)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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