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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55번지 낙산에 있다.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연혁]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낙산사라고 했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洛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말한다. 858년(헌안왕 2) 사굴산파의 개조 통효 범일(通曉 梵日)이 이 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낙산 위에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했다.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고 한다. 태조(재위 918-943)는 고려를 세운 직후, 봄 가을로 이 절에 사자를 보내어 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갑령(甲令)으로 삼았다.
그리고 속인들은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예배하면 푸른 새(靑鳥)가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1185년(명종 15) 병마사 유자량(庾資諒)이 예배하자 푸른 새가 날아와 갓 위에 꽃을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종 때 몽고의 침략으로 관음과 정취 두 성상(聖像)을 모신 건물을 비롯하여 모두 불에 탔다. 여의주와 수정염주는 이 절의 노비 걸승(乞升)이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명주 감창사(監倉使) 이녹수(李祿綏)에게 바쳤는데, 다시 1258년(고종 45) 기림사(祇林寺) 주지 각유(覺猷)가 고종에게 청하여 어부(御府)에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관음상은 이 때 화를 당하여 복장(腹藏) 속의 보물이 몽고병에게 약탈 당했다. 이규보(李奎報) 등이 다시 심원경(心圓鏡) 2개 등을 관음상의 복중에 넣고 겉모습도 복구했다. 1468년(조선 세조 14) 세조는 학열(學悅)을 시켜 중창하게 했다. 1471년(성종 2) 선학(仙鶴)이 용선전(龍船殿)과 영산전 등을 보수하고 단청했다. 4년 뒤 불 탔으나 다시 선학이 복구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관음전과 관음상, 정취전, 금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 종밀(宗密)이, 1643년(인조 21) 도원(道源)이 중건했으며, 1905년 경은(敬隱)이 선당(禪堂)과 후각(後閣) 등을 복구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3년 4월 당시 제1군단장 이형근(李亨根)이 원통보전과 범종각 등을 복구했다. 1976년 원철(圓徹)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적.유물] 이 절 일원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재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원통보전과 종각, 선실, 승당, 객실 등이 있다. 천왕문에 안치된 사천왕상은 조선 말기의 공장 김주성이 조성한 것이다. 문화재로는 동종(보물 제479호)과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원장(垣墻;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사리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 홍련암(紅蓮庵;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등이 있다.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 홍예문은 화강석 26개로 만든 반월형의 문인데, 당시 강원도에 있던 모두 26개 고을의 군수가 세조의 뜻에 따라 석재를 하나씩 가져와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최근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세웠는데,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되어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되었다. 높이 16m로 한 송이 연꽃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했는데,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밖에도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하는 자리에 홍련암이 있으며,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 중의 하나이다. [설화] 이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에 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과 천중(天衆) 등 8부신장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공중을 향해 예배드렸더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주므로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이들을 가지고 와서 의상은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했다.
의상은 그 곳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고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 보지 못했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신라의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조신이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해로하기 50여 년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는 꿈을 꾸고 난 뒤 수행에 정진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 1892-?)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한국의 사찰 14(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7),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한국의 명산 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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