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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제 학(동화작가)
아직 조그만 애가 어른들을 미워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 아빠 그리고 아직은 좋은지 싫은지 알쏭달쏭한 선생님도 어른인 걸요. 그건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나 선생님 때문에 미운 어른을 좋아해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치사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내가 미워하는 어른들 중에서 엄마 아빠와 선생님은 빼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어른들이 미웠던 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입니다. 사실 나는 어른들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동네에서 인사성 바르기로 소문난 아이였는 걸요. 어떤 때는 아는 어른이 나보다 저만큼 앞서 가면 뛰어가서라도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어른을 미워하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지 후회가 됩니다. 입학식 며칠 뒤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우리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다른 애들보다 1살이 작아서 그렇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지만 나에게는 큰 문제였습니다. 7살에 학교에 들어온 아이가 나 말고도 있는데다 여자 아이들 중에도 나보다 작은 애는 없었습니다. 내 키가 작은 이유를 곰곰이 따져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빠는 별로 크진 않지만 엄마는 친구 엄마들 중에서 큰편이거든요. 심한 병을 앓거나 음식을 골고루 먹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간신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어른들에게 인사를 너무 잘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죄다 내가 인사를 하면 몇번이고 머리를 쓰다듬곤 하셨는데, 그게 내 키를 작게 만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줄어든 키는 한 뼘도 더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자 이번에는 또 걱정이 하나 생겨났습니다. 아는 어른을 보고도 모른 척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래. 앞으로는 땅만 보며 걷는 거야.’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반짝거리는 생각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갈 때부터 나는 땅만 보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 계획은 100걸음 아니 50걸음도 못가서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현빈이 학교 가는구나. 아저씨하고 같이 갈까.” ‘아뿔싸, 뒤에서 오는 어른은 생각을 못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안 녕 하 세 요.” “그런데 오늘은 왠 일로 현빈이 목소리에 힘이 없을까? 늦잠 자다가 엄마한테 혼난 모양이구나. 고녀석 머리는 언제 봐도 알밤 같단 말이야.” 역시 걱정한 대로 아저씨는 몇번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습니다.
아침부터 기분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 방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어른들을 피하느라 놀지도 못하고 집안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동네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롤러 스케이트를 타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을 보고 인사를 안 했다 해서 꾸지람 들을 일도 없고 뒤에서 다가오는 어른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신나게 놀이터로 달려 나갈 때였습니다. 다행히 길가에는 아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길 모퉁이 떡집 아저씨도 가게 앞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셨습니다. 놀이터까지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롤러 스케이트는 여느 때보다 더 잘 미끄러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갑자가 내 몸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내 몸이 떡집 아저씨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아닙니까.
“오늘 따라 차돌이가 왜 이리 바쁘실까? 아저씨한테 인사도 않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으으으, 왜 세상에는 내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까.’ 어른들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은 들어보지도 않고 별명도 마음대로 짓습니다. 알밤, 차돌이, 도토리…. 하나같이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별명들인데.
“현빈아, 목욕탕 가게 어서 준비해라.” “또요.” “또라니, 3주나 됐는데.” “아빠도 안 계시는데.” “엄마랑 같이 가면 되지.” “에이, 싫어요. 이제는 초등학생인데 어떻게 여탕엘 가요.” “아직은 괜찮아. 너 친구 중에는 아직 유치원 다니는 애도 있잖니.”“그래도 싫어요. 저 혼자 갈래요.” “혼자서? 그럼 등은 어떻게 밀고.” “제가 다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저도 이제는 학생이잖아요.” “어쭈, 언제부터 그렇게 의젓해졌지? 좋아, 그럼 혼자 가 봐. 그런데 쉽지 않을 걸.”
엄마는 여탕으로, 나는 남탕으로. 나는 될수록 의젓해 보이려고 아랫배를 잔뜩 부풀리고 가슴을 쫙 폈습니다. 조금이라도 키가 커 보이라고 발뒷꿈치도 살짝 들었습니다. 얼굴, 배, 팔다리를 다 씻을 때까지 나 같은 어린애는 물론 동네 형들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형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였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보통 어른과도 달라 보였습니다. ‘어떻게 불러야지’ 하고 조금 망설이다가는 그냥 다짜고짜 때밀이를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저, 등 밀어 드릴게요. 그 대신 제 등도 밀어 주세요” “응? 뭐라고?” “등 밀어 드린다니까요.” “그래 그 소리는 나도 똑똑히 들었다. 그런데 너 혼자 왔니? 아직은…” “제가 너무 어린애라서 싫으세요? 서로 밀어 주면 좋잖아요. 넓이로 따지면 제가 손핸데.” “그건 그렇지. 그럼 누가 먼저 밀어 줄까.” “당연히 제가 먼저 밀어 드려야죠.” “왜?” “제가 먼저 부탁 드린 거니까요.” 이렇게 해서 둘은 서로 등을 밀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어―, 시원하다. 너, 보기보다 팔 힘도 참 세구나. 아직 애기 같은데.” “예? 애기 같다고요? 제가 그렇게 보여요? 전 학생이예요. 초·등·학·생.” “그래 그래. 내가 깜빡 실수를 했구나. 기분나빴다면 내가 사과할게.” ‘아니, 이럴 수가. 애한테 사과하는 어른도 있다니.’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내비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에서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 등을 밀어 준 사람이 스님이지 뭡니까. 나는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한 동안 스님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셨는지 슬며시 다가와서는 “자, 우리 이제 나가 볼까?” 하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스님과 나는 함께 목욕탕을 나섰습니다. 일요일 한낮 봄볕이 쨍쨍했습니다. 파란 옷으로 갈아입은 도봉산도 기분이 좋아보였습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저, 스님. 조금 전에 죄송했어요. 스님이신 줄 몰랐거든요.” “죄송하긴 뭘. 덕분에 아주 기분이 상쾌한 걸. 얘, 우리 아이스크림 사 먹을까?” “네, 좋아요. 저도 오백원 있어요.” “그건 너 혼자 있을 때 사 먹고 이번에는 스님이 사 줄게. 스님 등 넓이가 두 배는 됐을 테니까 당연히 내가 사야지.”스님과 나는 도봉산으로 오르는 길목 옆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너 이 동네 사니?” “네, 개울가 옆에요.” “잘 됐네. 나도 도봉산에 사는데. 그럼 우리 오늘부터 친구할까?” “정말요? 어디 사시는데요.” “저기 도봉산 중턱에 있는 천축사.” 이렇게 해서 스님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스님께 이름을 말해 드렸습니다. 스님도 ‘운공’이라는 법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내 얘기를 들은 엄마는 되게 부러운 눈치였습니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엄마, 조금만 놀고 올게요.” “그래, 너무 늦지 말고.” 집을 나오자마자 놀이터로 가려는데 웬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누런 진돗개였습니다. 뗏국물이 흐르는 걸로 봐서는 집을 잃은 개가 분명했습니다. 얼마나 굶었는지 배도 등가죽에 찰싹 붙어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자 두 무릎까지 꿇고 내 품에 안겨옵니다. 나는 개가 지저분한 것도 잊고 꼬옥 안고 말았습니다. 나는 우선 스님 덕분에 아낀 오백원으로 빵을 사서 누렁이에게 먹였습니다. 순식간에 빵 하나를 꿀꺽 하고도 계속 내 손을 핥습니다.
날이 저물어 오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도 깜깜해지기 시작합니다. 집에는 가야 하는데 도무지 누렁이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도 그런 누렁이가 싫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에 데려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집은 아파트거든요.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들리는 순간, 갑자기 운공 스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누렁이와 함께 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단숨에 천축사 입구에 도착했지만 돌계단을 오를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이를 악 물어야 했습니다.
절 마당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미리 밝혀 둔 연등만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을 뿐 인기척이라곤 없습니다. 나는 우선 한숨을 돌리고 나서 스님을 뵙기로 하고 법당의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갑자기 분주한 발걸음 소리와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입니다. 퍼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누렁이가 두 다리를 딱 벌리고 발자국 소리 나는 쪽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나는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누렁이의 목덜미를 껴앉았습니다. 누렁이는 걱정하지 말하는 듯이 꼬리를 힘차게 흔들어 내 등을 토닥입니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엄마였습니다. 엄마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 ―’, ‘현빈아 ―’ 하고 부르며 와락 껴앉았습니다. 그제서야 누렁이도 마음이 놓이는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절 마당을 어슬렁거립니다. 어느 틈엔가 운공 스님도 나오셔서 누렁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계십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친했던 사이 같습니다. 운공 스님께서는 혼잣말처럼 누렁이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말씀을 하십니다. 봄바람은 그 얘기를 내게도 살짝 전해 줍니다.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인데 올해는 하루 일찍 오신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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